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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수다 방
수다방백척간두 진일보 (百尺竿頭 進一步)
BY 고명석2021-12-29 23:16:28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 목, 피 할 곳도 없고 누구도의 도움도 없는 절박한 상황과 접할 때가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이러한 절망적이고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막다른 상황에 부딪치곤 한다. 과연 이럴 때 어찌할 것인가? 곧바로 들어가기 전에 그 의미성을 조명해 보는 것도 내 사유의 범주를 확장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 만큼 이 선어는 오늘날 다의적 의미를 가지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큰 키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혹은 백이란 단순한 100이라는 수의 개념을 보여주기 보다는 아주 많은 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것이 30미터의 높이를 보여주는 것이라도 하든, 매우 높은 높이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하든, 그 높이가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높다는 데서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빛에 건조하였다. 빨래를 기다란 빨래 줄에 그냥 걸쳐 놓으면 줄이 축 처진다. 때문에 빨래줄 중간쯤을 긴 막대기로 받쳐주면 줄이 처져 땅에 닿지 않기 마련이다. 간두는 이 빨래줄을 받쳐주는 막대기의 정상 부분인 것이다. 깎아지를 듯한 천애의 절벽 끝일 것이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 백척간두란 해결하거나 손 쓸 수 있는 틈이 완전히 박탈당해 막다른 곤경에 처한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선에서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백척간두라고도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철저히 버리라는 것이다. 혹은 깨달음에 대한 집착이나 깨달았다는 집착까지 놓아버리라는 의미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에서도 정상에 대한 안주나 집착도 놓아버리는 것이다. 감옥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이 더 크게 작용한다. 내 생각에 갇히고 가로막혀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것이다. 아주 미세한 집착과 최소한의 자존심일지라도 그것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바람 부는 위태로운 절벽에 홀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집착과 자존심, 아상을 떨쳐내지 않으면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천길 벼랑에서 한 발 내딛어라. 천애의 절벽에서 부여잡고 있던 손을 놓아라. 그 순간, 새로운 활로가 열리고 탁 트인 자유가 전개되는 것이다. 자아의식의 끝자락마저 비울 때, 즉 자아가 죽을 때 새로운 삶이 소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서는 깨달음도 예외가 아니다. 깨달음에 집착하는 이상, 그것은 아직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래서 장사경잠(長沙景岑) 선사는 말한다. 떨치고 멀리 가버 림은 마치 달인이 깎아지를 듯한 벼랑에서 손을 놓는 것이라서 부러워할 일이로다 (笙歌正濃處,便自拂衣長往,羨達人撤手懸崖)"라고 했다. 깨고 나라는 의식의 끝자락마저 어떻게 놓아버릴 수 있을까? 깨달음이나 최고의 순간에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탁 벗어날 수 있을까? 간화선에서는 화두로 그 활로를 내보인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온갖 사유의 출로가 막힌 막다른 골목이다. 아무리 생각으로 궁리해야 빠져나길 길이 없다. 따라서 백척간두란 모든 사유작용을 틀어막는 화두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백천간두에서 진일보하라고 했다. 그것은 화두를 실제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 화두를 받은 우리들은 왜 백천간두에서 진일보하라고 했는지 뼈 속 깊숙이 의심해 들어가야 할 터.
화두는 여지없이 달아날 것이다. 백척간두에서 왜 진일보하라 했을까? 천길 벼랑에서 왜 손을 놓으라고 했을까? 그것을 온 몸으로 부여잡고 큰 의심을 품을 때 모든 생각과 말의 자취가 소멸되어 화두가 역력하게 현전하고 그것을 탁 무너뜨릴 때 모든 생각의 자취, 아상의 그림자, 최소한의 자아의식마저 사라지는 게 아니겠는가. 진정 그 순간이 진일보의 밝은 소식일 것이다.
우리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는 것이다. 잘 되거나 못되거나, 순경계로 가거나 역경계로 흐르거나 그것이 깊어지면 백천간두다.
그런데 우리가 부둥켜 안고 있는 이 자리를 떠나서 그 암호는 풀리지 않는다. 그 암호를 풀어내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어떻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할꼬?
고명석 / 조계종 포교연구실 종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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