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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종교 생활진흙속의 연꽃
BY 혜만거사2021-06-05 22:16:15
깨달음 사칭(詐稱)과 계금취견(戒禁取見)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자신 역시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 알고 있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실행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욕망과 분노입니다.
도둑놈은 도둑질이 나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의 물건에 손이 가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행이 나쁜 것인줄 알면서도 자꾸 하게 되는 것은 습관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계를 어기는 삶은 이번 생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이전생에서부터 비롯된 숙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결박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결박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결박의 경(A10.13)’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Dasa imāni bhikkhave saṃyojanāni, katamāni dasa: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ñcuddhambhāgiyāni saṃyojanāni. Katamāni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sakkāyadiṭṭhiṃ,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kāmacchando, byāpādoti. Imāni pañcorambhāgiya saṃyojanāni. Katamāni pañcuddhambhāgiyāni saṃyojanāni: rūparāgo, arūparāgo, māno, uddhaccaṃ, avijjā, imāni kho pañcuddhambhāgiyāni, saṃyojanāni. Imāni kho bhikkhave dasasaṃyojanānī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열 가지 결박이 있다. 열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과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분노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자만, 흥분, 무명이다.”(A10.13)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결박은 크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 진, 치 삼독의 소멸이 결국 윤회를 멈추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 가지 결박은 단계적으로 소멸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돈오점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열 가지 결박은 크게 두 묶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묶음은 ‘낮은 단계의 결박(pañcorambhāgiyāni : 五下分結)’입니다. 이와 같은 결박은 욕계와 같이 낮은 세계에 묶어 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하분결에는 ‘1)개체가 있다는 견해, 2)회의적 의심, 3)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4)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5)분노’가 있습니다. 일종의 거친 마음의 장애라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이나 분노는 매우 거친 것으로 욕망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욕계중생을 특징하는 것입니다.
오하분결에서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이 ‘개체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라 합니다. 한자어로는 유신견(有身見)이라 하고 영어로는 ‘heresy of individuality’라 합니다. 신체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를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유신견은 총 20가지가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유신견에 대한 정형구는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M44)라는 식으로 나타입니다. 물질 대신에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대입하면 총 20가지 형태가 되어 20가지 유신견이라합니다.
20가지 유신견은 62가지 사견과 함께 타파되어야 할 견해입니다. 초기경전에서 견해는 사견을 말하며 정견과 다르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견이라면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론이 그럴듯하고 심오한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과 율에 비추어 어긋나면 견해가 됩니다. 그런 견해는 20가지 유신견과 62가지 사견을 합하여 총 82가지가 됩니다.
사견은 한마디로 자아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탐욕과 분노에 묶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박되어 있다고 합니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한 욕망과 분노의 노예가 되어 삼계와 육도를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장 먼저 유신견을 내려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豫流者)’에 들어 가는 첫 번째 조건이 유신견의 타파입니다.
가르침을 반신반의하는 자들
오하분결에서 두 번째 족쇄는 ‘회의적 의심(vicikicchā)’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의심입니다. 모든 의심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미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하늘의 구름처럼 커집니다. 그래서 “열반은 정말 실현 가능한 것일까?” 등과 같이 가르침을 의심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경전을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경전은 후대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틀림 없이 첨삭이 있었을 것이고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이 섞여 들어 갔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경전에는 범천이나 제석천, 악마와 같은 초월적 존재가 나오고 해와 달을 어루만진다는 신통이야기도 나오는데 자신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 보립니다. 이렇게 경전에 대하여 의심하다 보니 부처님이 선정이나 신통, 열반 등에 이야기 한 것에 대하여도 “과연 그럴까?”라며 의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 의심이라 합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회의론자는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기 위한 조건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이렇게 세 가지가 타파 되어야 하는데 그중에 회의적 의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론자는 불자라 볼 수 없습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일까 삼귀의문을 보면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하여 귀의한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 더하여 삼 세번 합니다. 이렇게 세 번씩이 귀의문을 독송하는 것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하여 귀의하는 것을 넘어서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가 법회 할 때 삼귀의문을 낭송하는 것은 넌센스라 볼 수 있습니다.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는 불자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의심하는 자들은 부처님을 칭할 때 마치 친구부르듯이 “고따마”라 합니다. 경전에 대한 불신이 칭호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초기경전에서 고따마라는 말은 외도들이나 부르는 말입니다. 외도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벗이여, 고따마여”라 하는 장면을 말합니다.
부처님제자나 신도들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라며 최상의 존칭을 붙였습니다. 누군가 부처님에 대하여 “석가모니”나 “고따마”라 한다면 그는 불자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설령 그가 불자라고 하더라도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는 회의론자일 것입니다.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은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을뿐더러 의심의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윤회하는 존재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수행에 대한 집착 (戒禁取見)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한 마지막 조건은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빠알리어로는 ‘실랍바따빠라마사(sīlabbataparāmāsa)’라 합니다. 초불연에서는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이라 번역했습니다. 한역으로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 합니다. 계금취견에 대한 대표적인 경전이 맛지마니까야 ‘개의 행실을 닦는 자의 경(M57)’이 될 것입니다. 개처럼 또는 소처럼 살면 청정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수행에 대한 집착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외도 중에는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소처럼 사는 자는 “소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동을 닦는다.”(M57)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도는 왜 소처럼 살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번뇌’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언어로 정신활동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말로서 개념 지어져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은 말을 하지 못하므로 개념 지어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언어가 없다면 개념 지어질 것도 없기 때문에 너와 나의 분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소나 개와 같은 동물을 착안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외도가 소처럼 살고자 한 것은 소의 마음을 닮기 위해서라 합니다. 소의 마음이라면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의 마음을 닮기 위한 수행을 합니다. 경에서는 “소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동을 닦는다.”(M57)라는 정형구로 표현됩니다. 철저하게 소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뿔을 달고 엉덩이에 꼬리를 달고 소들과 함께 풀을 뜯었다.”(Pps.III.100) 라고 주석에서는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계금취견입니다. 잘못된 수행방법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기와 같은 마음을 닮고자
오늘날 인터넷시대에도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을 혐오하여 마치 동물처럼, 식물처럼, 광물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동물은 말을 못하기 때문에 사물을 개념화 할 수 없어서 번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교수 같은 이는 지렁이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지렁이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이미 해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식물이나 광물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흔히 선사들은 분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분별로 사는 것이 최상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은 개념화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언어의 사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한 개념화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남으로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 봅니다. 동물처럼, 식물처럼,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면 너와 나의 분별이 없어서 해탈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이 나왔을 것이라 봅니다.
무분별을 말하는 자들 중에는 ‘천진불(天眞佛)’을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기와 같이 천진한 상태를 이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아개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즐겁고 괴로운 것에 대하여 동물적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소처럼, 개처럼 사는 것이나 아기처럼 사는 것이나 무분별의 번뇌 없이 사는 것에 있어서는 공통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산다고 해서 번뇌가 없어질까요?
맛지마니까야에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큰 경(M64)’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누구에게 이렇게 설했다고 기억하는가?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어린아이의 비유로서 그대들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오하분결을 거론하면서 ‘어린아이의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천진불사상입니다.
우리나라에 천진불사상이 있습니다. 어린아기와 같은 마음을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소처럼, 개처럼 사는 것처럼 어린아기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것은 외도의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못하는 어린 아기는 자아개념이 없어서 너와 나의 분별이 없습니다. 어린 아기의 마음을 닮으면 번뇌가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탐, 진. 치와 같은 성향도 없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어린 아기의 마음을 닮고 자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장애들을 누구에게 이렇게 설했다고 기억하는가?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
1)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존재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2)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의혹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3)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관습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4)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5)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뭇 삶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뭇 삶에 대한 분노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분노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말룽끼야뿟따여, 이들 이교도의 출가자들은 아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어린아이의 천진무구성을 이상을 삼았습니다. 말룽끼야뿟따는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세상에서 몸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악한 의도를 품지 않고, 악한 생활을 하지 않는 그러한 네 가지 원리를 갖춘 사람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도달하고,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복될 수 없는 수행자이다.”(M78)라는 견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서 번뇌만 사라지게 하면 깨달을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잠재성향 마저 뿌리 뽑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잠재성향이 남아 있는 한
인터넷 시대에 어떤 이는 너와 나를 구분하는 개념만 타파하면 깨닫는 것이라 합니다. 언어로 개념 지어진 것을 타파하면 안온하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내생이나 윤회 같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무분별의 경지를 실현했을 때 탐, 진, 치와 무관하게 걸림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긋난 사견에 불과합니다.
어린아이의 천진무구성을 이상으로 삼은 외도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소에게 번뇌가 없다고 하여 소의 마음을 닮고자 소처럼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의 마음은 규범과 금계에 사로잡혀 규범과 금계에 정복당하여 규범과 금계가 생겨나더라도 그것을 여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M64)라 했습니다. 이를 계금취견이라 합니다.
어린 아기의 천진무구성을 닮고자 하는 것이 천진불사상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명백한 외도사상입니다. 어린 아기가 천진불처럼 보이지만 어린 아기에게는 탐욕과 성냄 등 마음의 장애가 잠재성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외도가 어린 아기의 마음을 닮고자 어린 아기처럼 살고자 하지만, 그에게 탐, 진. 치와 같은 잠재성향이 남아 있는 한 번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탐, 진, 치의 소멸이 깨달음의 완성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1)개체가 있다는 견해, 2)회의적 의심, 3)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라는 결박이 부수어져야 합니다. 이 단계를 견도(見道)라 합니다. 열반과 같은 궁극적 경지를 본 자들이라 하여 깨달은 자가 아니라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시켜 나가는 과정이 깨달음입니다. 궁국적으로 열 가지 결박이 모두 풀렸을 때 더 이상 번뇌 없는 자가 되어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어떤 이는 무분별지의 경지가 되는 것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라 합니다. 마치 소처럼, 개처럼, 어린 아기처럼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마치 ‘멍 때리듯이’ 무분별지만 되면 깨달은 것이라 합니다. 이는 명백한 계금취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잘못된 수행방법과 잘못된 믿음입니다. 외도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무분별지를 주장하는 자는 “탐진치의 소멸이 깨달음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명백히 잘못 주장하는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결박의 경(A10.13)’에서 보듯이 부처님은 열 가지 결박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습니다. 열 가지 결박은 탐, 진, 치가 소멸해 가는 과정입니다.
열 가지 결박에서 낮은 단계의 결박(오하분결)은 욕계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고, 높은 단계의 결박(오상분결)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하분결은 탐욕과 성냄과 같은 거친 번뇌에 해당되는 것이고, 오상분결은 자만과 들뜸 무명과 같은 미세한 번뇌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열 가지 결박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부수어집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섰을 때 앞서 언급한 대로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이렇게 세 가지가 부수어집니다. 이 세 가지가 부수어져야만 본격적인 수행으로 들어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오점수입니다. 이는 부처님이“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차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Ud.51,A8.19)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점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열 가지 결박 역시 점차적으로 부수어집니다. 수다원이 견도라면, 사다함과 아나함은 수행도(修行道)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어서 무학도(無學道)라 합니다. 수행도에서 사다함의 단계는 탐욕과 성냄이 옅어진 것을 말합니다. 거친 번뇌라 볼 수 있는 탐욕과 성냄이 완전하게 제거 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탐욕과 성냄은 아나함 단계에서 완전히 부수어집니다. 아나함이 된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탐, 진, 치의 소멸이 깨들음의 완성입니다.
들뜸은 왜 아라한이 되는데 장애요인일까?
아라한 단계에서 모든 번뇌가 부수어집니다. 이는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 부수어짐을 말합니다. 즉 ‘6)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7)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8)자만, 9)흥분, 10)무명’이렇게 다섯 가지 미세한 번뇌를 말합니다. 이 중에서 ‘자만(māna)’은 비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비교하면 우월하거나 열등하거나 동등하거나 이렇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아나함에 있어서 자만은 아마도 “내가 누군데”라든가 “내가 아나함인데” “내가 성자인데”라는 우월감에 따른 비교의식일 것입니다. 이런 자만은 아라한이 되면 없어지는데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자아개념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개념이 없기 때문에 비교우위에 따라 자만이 생겨날 수 없을 겁니다.
오상분결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들뜸(uddhacca)’입니다. 흥분이라고도 하는 들뜸이 왜 아라한이 되는데 있어서 장애요인이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니까야강독모임이 끝나고 지하철로 귀가하는 길에 옆에 앉은 법우님에게 “왜 오상분결에 들뜸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되면 알려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오상분결에 왜 들뜸이 포함되어 있을까? 늘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유튜브 법문을 듣다 알게 되었습니다. 지견명상원의 법륜법사의 ‘뽓따빠다의 경(D9)’법문에서 입니다. 법륜법사는 법문에서 “들뜸이 있게 되면 탐욕과 성냄이 일어납니다.”라 했습니다. 이 짤막한 한구절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려면 자만이나 무명과 같은 미세한 번뇌뿐만 아니라 들뜸과 같은 번뇌도 부수어져야 함을 말합니다.
들뜸은 오장애에 있어서 후회와 함께 쓰여 흥분과 회환(uddhacca-kukucca)이라 합니다. 선정삼매에서 모두 제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정상태가 아닌 일상에서 들뜸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들뜸은 다름 아닌 ‘마음의 동요’라 볼 수 있습니다. 대상을 접했을 때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대개 느낌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고, 싫은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합니다. 거머쥐려 하는 것이 탐욕이고, 밀쳐 내려 하는 것이 성냄입니다.
들뜸이 일어나면, 설령 그것이 미세한 것일지라도 욕망과 분노를 야기합니다.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면 업을 짓게 되어 윤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상을 보아도 들뜸이 일어나지 않을 때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이 없다.(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라고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깨달음은 탐, 진, 치를 소멸함으로써 완성됩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
요즘은 인터넷시대입니다. 블로그와 카페를 넘어 유튜브시대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과 카톡과 같은 소셜미디어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깨달음 사칭이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사칭하는 자들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경전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깨달음을 이야기 할 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법과 율에 비추어 보아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한 자들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말하는 자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경장과 율장을 대조해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자신을 깨달은 자라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자신이 깨달은 자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자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니기 쉽습니다. 자아관념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깨달은 자라고 소개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의 특징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경전이 후대에 편집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초월적 존재나 초월적 이야기가 있어서 경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초기경전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것입니다. 결코 불자로 볼 수 없습니다. 불자라면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아 귀의 하지만, 회의론자는 법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기 때문입니다.
사칭하는 자들은 경전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문자에 집착한다느니,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느니 하며 폄하합니다. 반면에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법과 율에 비추어 보면 어긋난다면 계금취견에 빠진 것입니다.
무분별지를 말하는 자들은 마치 멍 때르듯이 사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마치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사는 자들 같습니다. 멍때리듯이 산다고 하여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탐욕, 성냄 등 잠재성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성향의 뿌리를 뽑아 내지 않는 한 결코 깨달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아야
깨달음의 완성은 탐, 진, 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부수어졌을 때 이루어집니다. 열 가지 결박은 단계적으로 부수어지는 것이 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궁극적 경지를 본 자에게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번뇌를 소멸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어도 최대 일곱 생이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깨달음은 소처럼, 개처럼, 어린 아기처럼 산다고 하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시적 현상일 뿐입니다. 탐, 진, 치가 남아 있는 한 막행막식하기 쉽습니다. 결국 행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의 두려움을 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D2) 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윤회의 두려움입니다. 또한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라 했습니다. 행위는 다름 아닌 업(業: kamma)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와 같이 뿐나여,
존재의 태어남은 존재에 기인합니다.
그는 행위한대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 접촉이 그를 접촉합니다.
그러므로 존재란 행위의 상속자라고 나는 말합니다.
뿐나여, 어두운 행위에는 어두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M5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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