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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코너삼성이 무너진다면
BY 강본두2024-11-07 10:50:23
2016년 어느 날 한 시민단체로부터 북콘서트 사회를 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책 이름이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이라고 했다. 저자는 박상인 서울대 교수다. 2016년은 삼성전자가 스마트폰과 D램 반도체를 동시에 석권한 때다. 박 교수는 “삼성전자는 과연 10년 뒤 생존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지만 콘서트를 진행한 나도, 객석에 앉은 독자들도 ‘삼성의 몰락’이라는 단어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당시 박 교수는 삼성의 최대 약점으로 지배구조를 들었다.
8년이 지난 지금. ‘삼성의 몰락’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AI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에 이어 메모리 왕좌도 내려놨다. 지난 3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3조8600억원으로 SK하이닉스(7조300억원)의 절반에 그친다.
내부 전언을 들어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의 위기는 2016년 즈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의사결정이 눈에 띄게 느려졌고, 혁신보다는 경영숫자가 중요시됐다. 때마침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연루되면서 미래 위한 투자 결정은 사실상 중단됐다고 한다. 사법리스크에 연루된 이후 CEO가 정치권 행사에 불려다니는 일도 잦아졌다. 지난해 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어묵을 먹으며 주목을 받았을 때 내부에선 “지금이 저럴 때냐”는 한숨도 많았다고 한다.
누구나 삐끗할 수 있다. 프로야구 우승팀도 정규시즌을 뛰다보면 연패할 때가 있다. 문제는 팀 분위기다. 팀 분위기가 좋다면 몇 게임 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부에 불화가 있거나 침체됐다면 얘기가 다르다. 삼성 자문에 응한다는 한 교수는 “내부의 패배의식이 이미 폭넓게 퍼져 있다”고 증언했다. 팀 단위 의사결정도 6개월씩 걸리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어차피 해도 안 된다’는 게 만연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연차가 낮은 직원일수록 심하다고 했다. 그는 “젊은 직원들은 ‘포스트 이건희’ 시대에 들어와 위기 극복 경험이 없다”며 “20년 넘게 다녀야 하는 직장이다보니 불안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최근 엔비디아는 미국 초우량 기업 30종목을 모아놓은 다우평균지수에 포함됐다. 반도체 최강자였던 인텔은 1999년 편입 이후 25년 만에 퇴출됐다. 2000년 이후 AT&T, HP 등 수많은 글로벌 IT·컴퓨터 기업들이 다우지수에서 탈락했다. 그 자리는 애플, 아마존 등이 채웠다. 미국 경제가 이처럼 역동적으로 변할 때 한국은 삼성, 현대, LG 등 재벌기업이 60~70년째 그 자리를 유지해왔다. 2000년대 이후 주요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네이버, 미래에셋, 셀트리온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재벌구조가 지목된다. 거목은 숲을 풍성하게 하지만 그 주변에는 큰 나무가 자랄 수 없다. 대기업·중소기업의 수직화된 하청구조에서는 새로운 기업이 나오기 힘들다.
삼성의 위기를 한국 경제 전체의 위기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삼성그룹만 해도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다. 삼성전자는 소니나 노키아처럼 특허권 등을 보유하며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유지하되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을 앞세워 아예 주력업종을 바꿀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구조조정은 다른 기회를 창출할 수도 있다. SK하이닉스의 HBM 개발에 삼성전자 출신들의 기여가 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출처: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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