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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코너지구 파괴 주범은 인간 아닌 자본주의다
BY 강본두2024-10-09 10: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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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은 이상기후, 특히 극심한 무더위로 몸살을 앓았다. 폭염경보가 발령되는 추석 연휴를 보내면서 많은 이들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지속적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오늘날의 지구는 이미 생태균형을 잃었고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했다. 환경문제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추세로 환경이 파괴된다면 머지않아 인류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오늘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전 인류적 과제이다.

사냥꾼과 화전민이 환경보호 절박성 이해할 수 있을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주로 민간 차원에서 진행되는 환경보호운동이다. 대부분의 환경보호단체는 사람들의 선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 제품을 사용하지 말자거나 과소비를 줄이자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분명히 올바르고 또 필요한 것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환경파괴를 막을 수 없다.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존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심각한 생존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환경보호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멸종위기 동물을 몰래 사냥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멸종위기 동물을 사냥하지 않으면 자신과 가족이 굶어죽을 수도 있다면, 그가 환경보호를 위해 사냥을 그만둘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아마존 지역의 밀림이 파괴되고 있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토지 소유의 불평등으로 인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빈농들이 생존을 위해 숲으로 들어가 화전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아마존 밀림을 파괴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 역시 환경을 보호하자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극심한 생존 불안은 자신(혹은 가족)의 생존에만 몰두하게 강요함으로써 공동체의 운명이나 인류의 안녕 등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해주는 사회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북유럽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버거운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선의에 호소하는 방식의 환경 보호운동으로는 환경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경파괴 일으키는 ‘과시적 소비’, ‘과시적 소비’ 부르는 불평등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슬로우 라이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간 불평등과 서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과소비를 줄이자거나 슬로우 라이프를 하자는 주장이 널리 퍼지기 힘들다. 오늘날의 한국처럼 치열한 개인 간 경쟁의 결과 개인 간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소비는 경쟁에서의 승리 혹은 서열을 상징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남들보다 더 비싸고 좋은 옷과 장신구를 소유하는 것, 남들보다 더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남들보다 더 비싸고 좋은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 등은 자신의 서열이 남들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서열이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소비를 ‘과시적 소비’라고 한다. 연구들에 의하면 불평등과 과시적 소비는 정비례한다. 집단 간 불평등, 개인 간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를 자제하자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불평등한 서열사회에서 과시적 소비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낮은 서열을 인정하는 것이고 남들한테 무시당하면서 사는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심하면 과시적 소비가 증가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불필요한 생산 – 평등한 사회라면 필요하지 않은 생산 - 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된다.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환경파괴를 막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적 이윤 추구와 욕망 억제하는 사회개혁 절실

진정으로 환경을 보호하고 싶다면 개인의 기본적인 생존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사회,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자본주의 제도는 인류의 생산력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통속적으로 말해 인류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환경파괴의 주범이다. 즉 이윤추구를 본성으로 하는 독점자본가들에 의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 식민지 약탈, 자본주의 공해산업 등이야말로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제도를 개혁해야만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개인적 이윤 추구가 환경보호와는 양립할 수 없어서다. 자본주의는 모두가 개인의 이익,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기초하는 사회제도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자본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이지 환경이 아니다. 일본의 독점자본가들이 후쿠시마의 핵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가들은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한 환경을 계속 파괴할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정부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독점자본가들은 각종 정부 규제를 약화시킴으로써 마음껏 환경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 이윤추구는 자본가의 본성이므로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자본가들이 각자 이윤을 추구하고 그 결과 환경이 오염되는 거대한 흐름을 멈춰 세우기란 불가능하다.

개인주의적인 개인들도 마찬가지다. 돈에 대한 욕망에 지배당하는 개인들 역시 돈을 더 많이 벌 수만 있다면 환경파괴를 감내할 것이다. 환경보호는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인 욕망, 특히 돈에 대한 욕망에서 해방되어 공동체나 인류의 행복을 염원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본가의 이윤 추구 동기와 개인들의 돈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강화하는 자본주의 제도가 지속되는 한 환경파괴는 막을 수 없다.


환경 파괴 부르는 자본주의의 과잉생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환경보호와 상극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스마트폰과 자동차 생산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주기적으로 신형으로 바꿔야만 할까?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자주 바꾸지 않고 오래 쓰면 쓸수록 환경은 덜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오래 쓰는 것을 자본가들이 달가워할 리 없다. 자본가들은 사람들이 신형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사고 싶게끔 부추기고 자극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계속 불필요한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불필요한 생산을 되풀이해야만 존속할 수 있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지구가 완전히 거덜나는 그날까지 환경파괴를 멈출 수 없는 사회제도이다. 할리우드의 공상과학 영화들에 자주 등장하는, 자원이 완전히 고갈된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찾아나서는 미래 인류의 모습이 바로 자본주의의 미래인 것이다.

과잉생산에 이은 폐기 처분으로 절정에 이르는 환경 파괴

자원을 낭비하는 자본주의 제도는 환경보호와 양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생산을 한다. 즉 자본주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수요에 맞춰 계획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별 자본가들이 각자 알아서 생산을 한 결과 사회적으로는 생산과 수요가 일치하지 않는 과잉생산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칫솔이 잘 팔리거나 잘 팔릴 것 같으면 여러 자본가들이 칫솔을 경쟁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에서는 칫솔이 과잉생산된다.

미국의 농업자본가들이 식량을 필요 이상으로 과잉생산한다고 해서 그 식량을 배고픈 사람들이나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듯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생산된 생산물은 폐기 처분된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상품을 과잉생산하고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끊임없이 폐기 처분한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무정부적이고 무분별한 과잉생산과 그로 인한 낭비는 환경파괴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인간 미워 말고 자본주의 너머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

오늘날 독점자본가들이나 자본주의 나라의 학자들은 환경파괴의 원인을 순수한 기술적 문제에 귀결시키면서 환경문제의 사회정치적 성격을 부인한다. 한마디로 환경파괴는 과학기술 발전, 생산력 발전이 초래하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또한 환경파괴의 주범을 인간 일반으로 왜곡하여 인간 증오를 부추기기도 한다.

미국 영화나 일본 만화 등에는 인간이 지구를 파괴한다면서 인간을 지구를 좀먹는 바이러스로 묘사하거나 인간을 전멸시켜야만 지구가 살아날 수 있다고 떠들어대는 인물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독점자본가들과 그 하수인들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전쟁과 전염병으로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없애야만 지구를 살릴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 일반이 아니라 반환경적인 자본주의 제도이다. 만일 자본주의가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계속 부인한다면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22세기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날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지속적인 경제 위기와 심각한 환경 위기는 인류에게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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