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입니다.
열대야 탓에 잠 못 이루던 때가 언제인가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민들레 편지 통해 첫인사 올립니다.
저는 국제와 외교·안보 분야를 맡은 이유 에디터입니다.
제가 이 신새벽에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게 된 건 밤새 뒤척이다가 끝내 잠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한 번 시민 독자 여러분께 글을 올려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하다가 마침 잘 됐다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킬링타임이나 하려고 편지 쓴다고 야단치시지는 않겠지요?)
기온은 떨어져 다들 잠들기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저는 요즈음 잠을 많이 설칩니다. 육십이 넘은 나이 탓도 있겠지만,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여름보다 '증세'가 더 심합니다.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근 들어 상시적인 무력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력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따져봤습니다.
잠정적인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민들레 기자로서 2년 가까이 맡은 분야에서 나름대로 기사를 쓰고 열심히 문제를 제기해왔다고 여겼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허무함이 범인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또 한 주를 시작하려는 월요일 새벽에 두서없는 넋두리와 하소연을 해서 죄송합니다.
2022년 11월 15일 민들레가 창간하고 오늘로 거의 22개월을 채웠습니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지만, 저 또한 월평균 20건의 기사를 썼다고 보면 지금까지 총 440건 정도가 됩니다. 물론 질과 양은 들쭉날쭉합니다.
그동안 제가 상대적으로 더 천착해온 이슈는 국제 분야에선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이었고, 외교·안보 분야에선 윤석열 정부의 대일본 외교, 즉 한·일 관계였습니다.
다들 아시지만, 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했습니다. 이스라엘 민간인 등 약 1200명을 살해하고 250명을 납치해 인질로 억류했습니다.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적극적 지원 아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오랜 세월 그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주민 75만 명이 내쫓긴 나크바(대재앙)를 시작으로 지난 75년간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은 말 못할 고난과 비극의 역사를 감안한다고 해도 하마스의 10·7 공격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양식에 맞지 않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입니다. 보복을 구실로 지난 11개월 동안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격과 지상 작전 등을 통해 가자지구를 사실상 초토화했으며, 그 결과 어린이와 여성을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망자만 4만1000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실종자와 부상자 수는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걸리적거리는 게 있으면 모두 제거합니다.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종교·학교·의료 시설을 가리지 않으며,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언론인과 의료진, 자원봉사자 등을 가리지 않습니다.
'유대 천년왕국'을 꿈꾸는 정착촌 출신 극우 유대 광신자 세력과 함께 총리 네타냐후가 보여주는 광기는 날로 도를 더해갑니다. 유엔총회의 압도적 휴전 결의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3단계 휴전 결의도 이들에겐 '마이동풍'이고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경고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전범 체포영장 청구도 씨가 먹히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심지어 가자는 물론,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으로 전선을 확대했습니다. 이스라엘군과 정착촌 민병대가 서로 짜고 팔레스타인 주민을 괴롭히고 죽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 700명 가까이가 살해됐습니다.
네타냐후 패거리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이 없는 팔레스타인"(리야드 만수르 주유엔 팔 대사)입니다. 만수르 대사는 4일 열린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이스라엘의 정착민과 군인들의 폭력이 들불처럼 번져 주민들을 그들의 고향에서 강제로 내쫓고 있다"고 분개했습니다. 아마 가자는 물론 서안에서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여 없애거나 모두 내쫓아야만 그들의 광기가 멈출지도 모릅니다. 하마스에 억류된 자국 인질들의 생명마저 외면하는 '비인간'입니다.
제가 극도의 무력감을 느끼는 대목이 바로 여깁니다. 민들레 에디터로서 네타냐후 정권과 유대 광신 세력의 음모와 팔 주민의 처참한 고통, 네타냐후를 비호하는 미국과 서방국 비판 목소리, 서구 언론의 문제점 등을 그동안 기사를 통해 전한다고 전했지만, 오늘도 네타냐후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표현할 언어마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언어도단. 그야말로 말과 글의 길이 끊긴 지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친일 행보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 대법원의 판결마저 무시한 채 작년 3월 일제 전범 기업의 불법적 강제동원(징용)에 대한 일방적 면죄부를 주고 우리 기업의 돈으로 판결금을 대신 준다는 '3자 변제'를 시작으로 △ 일본 후쿠시마 핵오염 폐기수 방류 '용인' 및 '무해 홍보' △ 3·1절과 광복절 경축사 통해 일제 과거사 지우기 주력 △ 독립기념관장 등 역사 관련 국책 기관들에 친일 뉴라이트 인사 임명 강행 △ 일제 강점기 조선인 국적은 '일본'이라 주장하는 각료들 임명 △ 일본 재무장 '용인' △ 독도 지우기 의혹 △ 한·일 군사동맹화 박차 △ 일본의 유엔사 가입 추진 등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일본이 원하는 모든 걸 내주고, 실제로 받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이 모든 걸 기획했다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말대로 '일본의 마음'이나 받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심전심으로 말입니다. 퇴임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초청해 마지막까지 살뜰히 챙겨주면서 정작 국민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윤 정권을 보면서 이젠 분개하기도 지쳤습니다.
뜻있는 언론인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 대통령의 과도한 친일 행보를 비판해왔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는 무기력감만 느낍니다. 이제는 친일 행보를 넘어 과감한 매국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독도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커질 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살육 행보'를 이어가고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친일 매국 행보를 이어가는 것은 둘 다 남몰래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입니다.
'제노사이드 공범'이란 치욕스런 오명을 들으면서까지 막대한 무기·자금 지원을 비롯해 네타냐후에 대한 든든한 뒷배 역할을 시종일관 해오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 관련해선 또 어떻습니까. 바이든으로선 중국 봉쇄를 위해 한·미·일 3국 동맹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한·일 관계를 무조건 '봉합'해야 하는 만큼 윤석열의 막무가내 행보가 이쁠 수밖에 없습니다. 윤석열이 한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친일 매국 외교를 하든 말든 남의 일일 뿐이겠지요.
모두가 민주주의와 인권이 꽃피고 경제적으로 끝없이 번영하는 '세계의 리더' 미국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신새벽, 문득 그것은 '환상'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네타냐후의 살육 행보와 윤석열의 매국 행보가 미국을 있는 그대로 '현실'로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미미하고 미약한 제 말을 귀담아들을 일도 없겠지만, 바이든을 비롯해 미국 엘리트 집단의 냉정한 자기 진단이 필요할 듯합니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하소연하다 보니 좀 후련해졌습니다. 무기력증이 당장 사라지진 않겠지만, 초심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어린 시절 ‘바위에 달걀 던지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두드리다 보면 열리겠지요. 많은 응원 부탁합니다. 이번 한 주도 평안하시고, 다가오는 추석도 풍성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