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야 9,1)
군사정권 시절 성탄절에 울려퍼지던 구약성서의 이 말씀은 교회 성당 다니지 않던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위로하고 감동을 주었다. 올해 성탄절에도 같은 성서 말씀이 낭독될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되었을까. 어느새 우리는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누구 탓일까.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메시지들이 발표된다. 하느님에 대한 경탄과 아름다운 예화가 멋지게 어우러진 성탄절 메시지들이 왜 대부분 영혼 없는 공허한 설교로 들릴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성탄절 메시지들이 한국 현실과 상황을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금 누가, 어느 세력이 대한민국에 불의와 어두움을 가져왔는지 정직하게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윤석열 검찰독재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고 따끔하게 비판하는 메시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둘째, 메시지를 발표하는 종교 지배층과 종교 단체의 평소 행동이 메시지의 내용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메시지와 메신저 사이에 모순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메신저는 메시지를 정확히 말해야 하고, 메시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신뢰받지 못하는 메신저가 전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은 경청하지 않는다. 메신저와 메시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메신저나 메시지 둘 다 신뢰받기 어렵다. 어떻게 하면, 성탄절 메시지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설득할 수 있을까.
메시지와 메신저가 일치해야 감동 있다
만일 예수가 멋진 메시지를 수없이 전했지만, 그 평소 행동과 삶이 그저 그렇고 그랬다면, 과연 예수가 남긴 메시지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예수는 메시지를 남겼고, 그대로 실천했다. 예수가 말한 메시지와 예수라는 메신저는 일치했다.
예수의 메시지는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했다. 예수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라고 사람들에게 말만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예수는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라고 사람들에게
말만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였다.
2004년 12월 30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큰 화재가 났다. 이 사고로 195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68세의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현장에 달려와 구조 작업을 도왔고, 이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는 안전 점검이 소홀했고 인명 구조가 늦어진 점을 꼬집어 정부 당국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9년 뒤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었다.
예수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둘 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했고,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했다.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한 개신교와 가톨릭 지배층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고 싸워왔는가. 평소 그렇게
살아왔는지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메신저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과 설득력이 없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억압자를 돕는 것이지, 희생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가해자들에게 힘을 더하는 것이지,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작가이며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의 말이다.
우리는 예수 탄생을 정말로 기뻐하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윤석열 검찰독재 정권에게 억압받는 시민들과 슬픔과 번뇌를 함께 하고 있는가. 억압받는 시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사해
왔는가.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해 왔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사의 말까지 해석한다 하더라도,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윤석열 검찰독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없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지만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1세기에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장 고뇌했던 주제는, 하느님이 선택하고 사랑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뾰족한 설명을 찾아내지 못한 그들은 이스라엘의 예수 거절이 온세상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하느님의 오묘한
계획이라고 결국 생각했다.
2,000년 지난 오늘,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장 고뇌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세상의 절반 넘는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일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과 목사, 신부들 중 많은 이들이 사실상 예수를 거절하고
왜곡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 아닐까. 예수 탄생은 오늘도 교회와 성당에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