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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생활불사(不死)- 죽음의 초월
BY Ariya Kusala2022-08-03 23: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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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不死)란?

초기경전에 나오는 ‘불사(不死)’의 의미는 정말 죽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rhetoric(과장된 미사여구)일 뿐일까?

Amatam(Pali)/Amrtam(Sk): 'a(부정접두사)' + 'matam(죽음)' = 불사, 죽음의 초월(non-dying)

 

초기경전에 나오는 불사(amatam)라는 단어는 보통 immortality(불사)로 번역되지만 사실 어원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움(freedom from death)” 또는 삶의 계속됨(continuance of life)를 의미한다.

붓다 이전 바라문교(베다)에서 보는 불사의 개념

베다와 브라흐만 전통에서 영원 또는 시간을 초월한 경지(timeless essence)는 인간 세상의 끝임 없는 시간의 흐름(바퀴)를

의미하는 윤회(samsara)를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베타철학이 완성된 우파니샤드 이전에는 불사란 신들이

희생제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되는(윤회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생이 이어짐’, ‘오래 삶’을 의미하였고, 한번 태어나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베다에 나온

신들도 삶을 지속시키는 희생제가 없으면 소멸하기 때문).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불사’란 신들에게 적용된 개념보다

더 구체적으로 ‘100년을 사는 길고 완전한 삶(장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들은 기본적으로 워낙 오래 살기에 죽음에 대한 절박함이 없었고 인간은 아무리 장수를 한다해도 100년을 살 뿐이니

예측 가능한 죽음을 악으로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베다에서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윤회)를 말하고 있지만,

윤회관은 당시로서도 결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묘사된 세계관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베다 후기로 넘어가면서) 연장된 삶(윤회)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해탈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희생제를 통해서가 아닌 깨달음(베다에서 말하는 지혜: tat tvam asi- 그것이 나임을 아는것)을 통해서 이룰 수 있었다.

[Steven Collins, 1982, 「Selfless persons」 참조]

결국, 붓다 당시의 인도 세계관(브라만-사문종교)에서 불사란 생명체로서 죽지 않음을 의미한다기 보다 생과 사의 반복,

즉 윤회에서 벗어남으로써 더 이상 다시 태어나고 죽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해탈이 불사의 경지와 동일시된 것이다.

죽음을 초월(불사)하기 위하여

1) 깨닫기전 붓다(싯다르타 왕자), 사리뿟다, 목갈라나가 수행의 길에 들어선 동기

① 붓다의 경우 [중아함 204]

"전에 내가 최고의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을 때, 나는 이와 같이 더 생각했다.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순진하게 병들기 마련인 것을 찾는다.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순진하게 늙기 마련인 것을 찾는다.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순진하게 죽기 마련인 것을 찾는다.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이 걱정하고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순진하게 걱정하고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찾는다.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순진하게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찾는다.

나는 이제 차라리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니르바나의 최고의 평화를 찾는 것은 어떤가? 늙음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걱정과 슬픔으로부터... 오염원으로부터... 자유로운 니르바나의 최고의 평화를 찾는 것은 어떤가?

그때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음껏 즐기는 깨끗한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진 29살 청춘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때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울었고 나의 친척들이 슬퍼했다. 나는 신념을 갖고 수행승의 옷을 입고

재가의 삶을 떠나서 도를 닦아 몸에서 생계의 청정을 유지하고 말과 마음에서 생계의 청정을 유지하기 위해 출가했다."

② 사리뿟다, 목갈라나 (둘다 브라흐민 자녀로 옆마을 친구였음)

그때 라자가하에서 큰 축제가 열렸다. 첫번째 날과 두 번째 날 그들은 축제를 즐겼다. 그러나 세 번째 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년도 되기 전에 모두 죽고 만다. 해탈의 길을 찾아야하지 않을까?'라는 마침내는 죽고 마는 인간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꼴리따(목갈라나)는 우빠띳사(사리뿟따)에게 물었다.

"오늘 너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는데 무슨 일이지?"

"꼴리따, 이 공허한 쇼를 즐기는 것은 전혀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 축제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내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야."

꼴리따가 대답하였다.

"내 생각도 너의 생각과 똑같아."

이들 둘은 출가하여 수행하기로 결심하였다.

③ 앗사지, 사리뿟따 [율장 마하왁가 1편 23~24] 

어느 날 사리뿟다는 탁발하고 있는 한 비구(앗사지)를 보았는데, 그의 수행자다운 행동거지에 이끌려 따라가서 물었다.

"존자여, 그대의 얼굴은 아주 맑고 빛납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누구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

"사꺄족에서 출가하신 위대한 사문이 계시는데 그분은 깨달은 성자이십니다. 나는 그분께 출가하였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대 스승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나는 출가한지 얼마 안 되어 가르침과 계율의 초년생입니다. 그대에게 온전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뜻을 간단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존자여, 많든 적든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 뜻만 말해 주십시오. 많은 수식보다는 그 의미를 듣고 싶습니다."

이에 앗사지 존자는 말하였다.

"모든 것은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고 여래는 그 원인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소멸을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사문은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담마라면, 우리들이 무수한 겁 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슬픔 없는 길을 그대는 꿰뚫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이런 간결한 표현의 담마를 들었을 때, 티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

그리고 목갈라나를 찾아갔다. 목갈라는 말하였다.

"벗이여, 그대의 안색은 맑고 빛납니다. 불사의 경지라도 얻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불사의 경지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앗사지 존자와의 만남과 그가 들려준 깨달은 성자의 가르침을 말해 주었다. 이에 목갈라나는 말하였다.

"벗이여, 깨달은 성자에게로 갑시다. 그분이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250명의 제자를 데리고 죽림정사의 부처님께 갔다. 그리고 부처님께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이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뒤에 우빠띳사는 사리뿟따로, 꼴리따는 마하목갈라나로 불리었다.

12연기의 시작(역순으로 볼 때)에 생-노사가 위치하듯, 붓다, 사리뿟따, 목가라나 등 초기 승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사를

찾아 수행의 길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평범하게 세속에 물들어 살던 사람들이 불사의 경지를 추구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많은 경우를 볼 때 죽음에 대한 각자의 고민(두려움)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죽음은 살아있는 것들의 가장 큰 고통으로,

생에 대한 집착에 의해 생겨난다(다르게 말하면 존재에 대한 집착에 의해 죽음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불사 관련해 생각해 볼 문제

필자가 죽음의 극복, 죽음의 초월을 의미하는 '불사'라는 단어 관련해 떠올랐던 의문과 그에 대한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보았다.

윤회를 하는데 왜 불사를 찾는지? 윤회를 하는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필자는 당시 인도의 모든 사람들이 윤회 세계관을 믿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붓다가 활동하던 고대인도에 불사

(영원불멸인 아뜨만의 존재)를 주장하여 상주론에 해당하는 브라만교가 있던 반면, 단멸론을 주장한 학파도 있었다는 점과

붓다를 포함한 당시 사문 계열은 브라만들의 사상(베다)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회사상 또한 당시 있던 인도의

모든 학파가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고, 윤회사상을 받아들이는지 말지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도 사후세계에 관해서는 개인 각자가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

만약 윤회론을 믿는다고 해도 죽음을 통해 개성 또는 고유의 개체성은 소멸한다고 봤을 수도 있다.

당시 고대 인도 세계관에서 물질과 정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면, 윤회 속에서 이번 생의 죽음은 육체는 흩어져 소멸해도

정신(아뜨만)은 다음 생(인간, 동물 아귀 등)으로 이어진다고 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베다에 근거한 윤회론인 오화이도설은

당시 사상적으로 완전하다고 볼 수 없었고 윤회한다고 해도 ‘나’를 나타내는 고유의 개체성이 소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빠니샤드 시기에 바라문들이 ‘영원불멸의 나’의 속성을 가지는 아뜨만을 구하려 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베다를 믿는 입장에서도 삶을 고통으로 본다면 다시 태어나 또 새로운 고통을 느끼는 것이 두려워 윤회를 깨고자 하는

동기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카스트 제도하에서 집안의 의무와 책임, 노동에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경우에 그럴 수 있는데,

당시 이런 이유로 출가를 한 사람들도 많았던 듯하다.

여기서 불사의 의미 관련해 모순되는 점이 하나 나오는데, 해탈함으로써 윤회를 끊어 다음 생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실 해탈을 이룬 이번 생에서 나는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즉 해탈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 불사를

얻었지만 '나'는 이번 생이 끝나는 순간 육체적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모순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불사의 의미는

생물학적 개체의 죽음이나 육체적 죽음에서 벗어난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브라만사상에서 ‘탓트밤아시[그것이 나이다]’를 깨달아 '나'라는 개체의 자아(아트만)과

우주적 자아(브라흐만)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생물학적 개체의 죽음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번 생이 끝나면서

내 육체는 소멸하지만 나의 자아(아트만)은 브라흐만으로 돌아가(?) 더 이상 다시 개체로서 환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육체가 사멸하더라도 아트만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아트만을 깨달은 순간 이미 불사임을 확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해탈로 불사를 얻었지만 나는 이번 생이 끝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깨달음을 통해 해탈을 한 붓다와 아라한들은 이번 생이 끝날 때 ‘죽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열반에 든다

(반열반, parinibbāna: 육체적 잔재 마저 소멸된 완전한 열반)’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탈로 불사를 얻었는데 죽는다는 것은 말의 모순이기 때문에 해탈한 사람들의 육체의 죽음을 '죽는다'고 하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한 것이다.

불교는 무아사상을 통해 영원한 자아인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아트만이 생을 거듭해 지속해

나가는 자아의 연속성을 의미한다기보다, 오온 또는 나와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함께 흘러가는 세계의 연속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그야말고 '함께 흘러감'을 의미하는 '윤회(saṃsāra)'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무아를 깨달은 순간, 다음 생에 윤회하여 태어나는 ‘나(오온)’는 ‘지금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는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하나의 망상일 뿐이며, 나라는 존재는 지금 여기서 오온으로

조건지어진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아를 깨닫게 되면(해탈하면) 죽음이란 살아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결합해

'경험적 나'를 구성하고 있던 오온이 죽는 순간 흩어지는 것일 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사'의 경지가 의미하는 것들

필자가 초기불교를 공부하며 불사의 경지로 묘사되거나 의미한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아보았다.

1) 불사 = 열반 = 무위 = 무행(아상카라) = 아라한의 경지

아라한의 중요한 속성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음’을 의미하는 무외(無畏;abaya)를 들 수 있다.

2) 조건지어짐이 없는 경지 = 연기하지 않는 경지

12연기 구조상 노사의 앞 단계 중 어느 것(주로 무명, 갈애)이 소멸하면 뒷부분은 따라 소멸하기 때문에 지혜(무명 대체)를

통한 탐진치의 소멸(갈애 대체)로 노사를 극복하고 불사를 얻을 수 있다.

불교 교리에서 18계는 세상 그 자체의 발생을 의미하는데 12연기의 구조에서 촉(삼사화합)이 발생하지 않으면 세상 또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촉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소멸 또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없다면 세상 속 나의 발생과 소멸 또한 없다.

비슷한 의미로, 지금 여기에 머물며 미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미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빠빤짜(희론)일 뿐)

죽음에서 벗어나 거나 죽음을 초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현상을 단지 지켜보는 통찰명상의 수행법과 통함).

3) 무아를 깨달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남 = 죽음의 초월 = 불사

깨달음을 얻어 해탈한 이후 아라한들의 삶을 표현하는 말로 '현법락주(現法樂住)', '안지정(安止定)'이라는 말이 있다.

현법락주는 아라한들이 해탈한 이후 삼매에 들어 '법에 머무는 즐거움(또는 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말하며

'선정 속에서 고요하고 편안하게 머문다'는 의미의 안지정(安止定)과도 같은 의미이다.

아라한의 경지를 가장 잘 묘사한 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스승들의 말들을 모아놓은 『장로게경』 에 나오는 아래의 문장을 소개한다.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Theragatha. 607, 654, 685, 1002 게송]

마치며

필자가 보기에 당시 고대 인도의 사상적 배경 속에서 ‘불사는 죽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보다 '깨달음을 통해 해탈함'으로

해석함이 더 적합할 듯하다.

사실 깨달음을 얻기 전 수행자(보디삿뜨바)일 때의 붓다의 말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숫따니빠따에서는 불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지만,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붓다의 설법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니까야에는 불사 대신 열반 또는 해탈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비중이 더 커진다. 불사를 열반과 동일한 경지로 두거나 수식어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봤을 때 열반이나 해탈과

동일한 수사적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불사를 말 그대로 ‘죽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본다고 해도, 불사를 연기, 중도, 무아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라는 영원한

실체가 없으니 죽음도 없다’고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거나, 해탈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났으니 더 이상(다음 생부터)

생과 사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은 후대 '중도'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불교철학을 집대성한 나가르주나의 중론의 불생불멸, 불거불래, 불일불이,

불상부단의 팔불중도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무상이고 무아로서 물질과 정신의 혼합체(오온)인 경험적 현상으로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어도, 고정된 실체로서 '나'라는 것은 없으며 단지 존재를 갈망하는 갈애가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우리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 또한 무아(오온)적 관점에서는 육체에 조건지어 일어나던 의식이 육체가

소멸됨으로 인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된 것일 뿐이다.

필자는 살아있는 동안 죽음에 대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깊은 삼매에 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깊은 삼매(선정) 속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이 소멸되었을 때(심지어 의식마저 끊어졌을 때), 죽음과 같은 상태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수행을 통해 깊은 삼매를 실제 체험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무아를 깨닫을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있을 수 없고 삶에 대한 집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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