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종교 생활염오(厭惡)와 이욕(離欲)
BY Ariya Kusala2022-04-29 11:34:29
“물질(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行), 의식(識)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싫어한다. 싫어하기 때문에 탐욕에서 벗어나며, 탐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SN22:15]
[※ 경전 원래 내용에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각각에 대해 반복되는 구절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필자 개인적으로 전체 수행과정에서 머리로 지혜를 얻어 깨닫는 것만큼 중요하게 보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감정적으로) 싫어함을 느껴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염오(厭惡)와 이욕(離欲)의 과정이다. 염오와 이욕이라는 한자말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용어라 일반인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쉽게 말해 그동안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아했던 것들로부터 ‘강하게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염오(厭惡, nibbida)’,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즐겁지 않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원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 집착하고 있던 것을 놓아버림’이 ‘이욕(離欲, virāga)’이다 [염오, 이욕 두 단어를 합쳐 염리(厭離)라고 하기도 한다]. 염오와 이욕과 관련해 전체적인 수행의 과정을 요약해 놓은 경전 구절을 위에 인용하였는데, 즐겁거나 좋아하는 느낌이 싫어하는 느낌으로 변하고 나서야 우리가 즐기고 좋아했던 그 대상 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염오에는 이욕이 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즐기고 좋아했던 것에 대해 반대로 강렬한 싫어하는 느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부터 바뀔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위 경전에 나온 오온을 무상, 고, 무아의 진리로 보는 것이다.
붓다는 ‘나’에 대한 집착[또는 자유자재이고 영원 불멸의 아트만이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나를 그 구성요소인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일시적 화합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구성하는 오온 각각에 집착하게 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유명한 예로 윤회하는 주체를 ‘식’이라고 생각한 사띠 비구가 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오온 각각을 반복된 구문으로 언급했지만 여기 나온 색, 수, 상, 행, 식을 ‘오온에 대한 취착’을 의미하는 ‘오취온(五取蘊)’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나를 구성하는 오온에 대한 미세한 집착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무상, 고, 무아라는 붓다가 세상을 바라본 관점(지혜)으로 다시 한번 철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고 하는 오온의 집합체뿐만 아니라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 각각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게 되고, 싫어하는 감정은 탐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경전 내용의 흐름을 아래 간단히 요약해 보았다. 오온(색, 수, 상, 행, 식)을 무상 고 무아로 보는 지혜 ▶ 싫어함(염오) ▶ 탐욕에서 벗어남(이욕) ▶ 해탈 ▶ 해탈했음을 앎, 윤회하지 않음을 앎 [SN22:15] 평소 탐욕(또는 갈애, 잡착)에 물들어 있는 범부들에게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야 탐욕과 같은 해로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해탈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싫어함(염오)이 일어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경험에서 좋아서 시작한 일들이 어느 순간 스트레스로 느껴질 때 우리는 그제서야 눈을 돌려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동안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에 취해 우리 스스로 자각 없이 계속 집착해 온 것들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여유를 드디어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로 가는 수행의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싫어함의 단계이다. 염오와 이욕을 일상에서 일반인들도 활용할 수 있는 수행방법으로 적용한다면 아래와 같을 것 같다. 일이든 운동이든 취미든 연인이나 가족과 같은 특정 사람과의 관계든, 우리가 무언가에 한창 빠져서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한 가지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하던 것을 멈추고 잠시 호흡에 집중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그동안 내가 이 일에 몰두하면서 소홀히 하였거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직업적 업무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자기 개인적 일이나 건강,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관계에 대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운동이나 취미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빠져있을 경우 자신의 금전적인 상황에 대한 파악, 생계를 위한 일에 대해 소홀해졌을 수 있다. 또한 특정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몰두는 그 사람에 대한 애착을 낳을 수 있고 그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될 수 있다.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야 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탐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범부들이 그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균형 잡힌 마음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수단으로써 싫어함이라는 강한 부정적 감정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일상에서 누군가가 누가 봐도 심할 정도로 하나에 몰두하고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틈틈이 ‘하던 것을 멈추고 잠깐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의 여유를 갖는 이런 과정 속에서도 무언가에 대한 탐욕이나 집착의 강도는 분명히 약해질 것이고 일시적이지만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이욕]. 물론 특정 대상, 또는 일에 대한 탐욕과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강한 싫어하는 감정인 염오가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싫어함이라는 염오의 필요성과 관련해 불교에 관심이 없거나 불교 공부나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창 즐겁게 어떤 것이나 일에 몰입해 있는 와중에 굳이 멈추고 여유를 갖고 돌아보며 그 마음의 동기나 추진력을 일부러 약화시키거나 없앨 필요가 있는지 말이다. 당사자도 즐겁고 하는 일도 잘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런 와중에 우리가 하나에 몰입한 나머지 분명 시야가 좁아져 다른 중요하지만 놓치고 있는 일도 많을 것이며, 몰입하는 동안 소홀히 하고 놓치고 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은 해도 어디까지나 모든 상황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정답은 없고 각 개인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판단해야할 문제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몰입해 즐거워하고 무언가 자기가 원하는 성과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일시적이며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창 즐겁다고 생각했던 일도 어느 순간, 하기 싫고 귀찮아질 수 있다. 한때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물건도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어질 수 있으며, 좋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던 연인, 친구도 감정이 변하면 이전과는 달리 서먹해지고 다툼도 잦아질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평안한 삶을 최대한 길고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하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은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잠재적인 리스크를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어느 하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붓다가 생각한 일상에서 탐욕에서 벗어난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한번 생각해보았다.
[출처] 염오(厭惡)와 이욕(離欲)|작성자 AriyaKusa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