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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코너 노동시간, 임금노예냐 삶의 주인이냐의 갈림길
BY 민들레2024-01-11 23: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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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선진국 영국의 18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더불어 기계 시스템이 공장에 도입되던 시절, ‘태풍’이 몰아쳤다. ‘노동시간 연장’이란 태풍이다.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가 “증기기관이 자유를 위해 아우성치고 기계가 인간의 손을 구하려고 절규”한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노동자들은 1주일에 4일 이상 일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면’ 굳이 더 많이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인간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 입장에서는 한 시간도 소중한 터에, 이 ‘게을러빠진’ 노동자들의 습속이야말로 청산할 ‘적폐’였다.

바로 이 시점에 잭 커닝엄(Jack Cunningham)이 나섰다. 그는 1770년에 <무역과 상업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이렇게 말했다. “신께서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것은 나머지 요일들은 노동에 속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주일에 6일 일하는 것은 신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므로 잔혹한 일이 아니다.” 그에게 <성경>은 구세주였다! 게다가 ‘게을러빠진’ 노동자들을 향해 “생필품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더는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 했다. 요컨대, 커닝엄의 시각에, a) 노동자는 천성적으로 게으르다, b) 물가 인상 등 경제적 압박을 가해야 열심히 일한다, c) 신의 뜻대로 일주일에 6일 일해야 한다, d) 노동이 게으름을 치유한다고 봤다. 모두 ‘유령’ 같은 얘기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250년이 흐른 지금의 대한민국, 바로 여기서도 비슷한 유령이 설친다. 특히, 정치경제 지도층(?), 보수언론, 보수 학자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

첫째, 박근혜 정부(2013~2017) 당시 노동부는 근로기준법(2004년부터 주5일제, 주40시간제 단계적 시행)에 대한 기묘한 ‘행정해석’으로 장시간 노동을 ‘합법’으로 정당화했다. 그 기묘한 논리란 “토요일과 일요일은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1주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250년 전, 영국 커닝엄의 ‘신의 논리’보다 더 고약하다. 당시 노동부에 따르면, (근로기준법상 8시간 × 5일) + (근로기준법상 1주일 총 연장근로 12시간) + (토‧일요일 8시간씩 × 2일) = 1주 ‘68시간제’라는 묘한 결론이 나왔다! 장시간노동과 피로누적, 과로사를 만성화했던 배경이다.

둘째, 박근혜 정부 직전이던 2012년에 발간된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 내용이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과 같았다. 재벌들 연합체인 전경련은 당시 대선 직전에 미리 ‘차기 정부 정책과제’ 보고서를 출간, 새 정부를 ‘길들이려’ 했다. 그 중에는 “임금 연공성을 낮추기 위한 제도적 개선”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 “불이익변경을 경영상 필요가 있거나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경우 동의 불필요” 등 억지 논리가 나온다. ‘쉬운 해고’나 ‘임금피크제’가 기승을 부린 것도 이 때다. 250년 전 커닝엄이 ‘게을러빠진’ 노동자의 습속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나 조건을 바꾸려 했던 것과 같은 논리! 더욱 놀랍게도, 박근혜 정부와 전경련 등 대기업은 이런 방향으로의 노동개혁(?)을 위해 (박근혜와 최순실의)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거액의 돈을 입금(각기 496억, 288억)함으로써 은밀한 거래를 했다!

셋째, 윤석열 정부는 2022년 5월 출범 직후부터 ‘건폭’ 내지 ‘이권 카르텔’ 등 용어를 써가며 ‘노동조합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건설노조나 화물연대 등 ‘노조 때리기’만이 아니라 자본에 유리한 ‘직무·성과급 확대’, 나아가 ‘공무직위원회·안전운임제 중단’은 물론, 심지어 ‘주 69시간 상한제’까지 도입하려 한다. 나는 현행 노동법에 대한 억지 해석을 통해 ‘주69시간 상한제’를 도입하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시대착오적 ‘노동중독장려회’라 비판한 바 있다(“노동과 자유, 그 아름다움과 무서움” <한겨레> 2023.1.5). 흥미롭게도 이런 식의 노동개혁을 어용학자나 정치경제 지배층은 ‘국가 경제발전’과 ‘국민 행복증진’ ‘미래지향적’ ‘자율과 책임의 노사관계’ ‘노동시장 활력 제고’ 등 미사여구로 포장한다. 자본을 위해 ‘솔직했던’ 250년 전의 커닝엄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그 포장지들을 차곡차곡 벗겨내면? 맨 마지막에 남는 건 ‘중독증’이다. 무엇에 대한 중독? 재물중독과 권력중독이다. 이를 위해 전 국민에게는 경제성장 중독증과 일 중독증, 소비 중독증을 체계적으로 조장하고, 자본과 국가는 이를 적극 활용한다. 그에 비하면 한동훈이 집착했던 ‘마약(중독)과의 전쟁’은 ‘새 발의 피’다. 그나마 전혀 ‘진심’이 없는 허풍에 불과했다. 그 허풍에 (이태원 159명 참사와 이선균 사망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그러나 불행히도, 스스로 중독에 빠진 자들은 자신이 중독임을 전혀 모른다.


'하루 8시간 노동'을 농락하는 온갖 꼼수들

이제 다시 노동시간의 역사로 가보자. 영국에서 1833년 공장법으로 최초의 노동시간 규제가 나왔는데 하루 노동이 15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법이었다. 1844년 이후론 12시간 노동제가, 1848년엔 여성과 아동에 10시간 노동제가 도입됐다. 그러나 법을 비웃듯 1863년에 세계 최초의 과로사가 발생했다. 메리 앤 워클리라는 20세의 여성! 1960~70년대 전태일의 청계천 작업장과 비슷했다. 메리는 예사로 하루 16시간 일했으며 성수기를 맞아 휴식도 없이 27시간 연속 노동 중 쓰러졌다. 그랬다가 노동자의 격렬한 투쟁과 양심적 근로감독관의 노력으로 1930년대부터 하루 8시간제로 변했다.

한국은 어떤가? 일제 아래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공장 노동자가 출현했다. 하루 12시간 노동은 기본이고 16~18시간 노동도 예사였다. 휴일은 1년 중 10일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고 1925년 치안유지법에도 파업이 분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은 8시간제를 요구했다.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 중인 1953년에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등 노동3법이 제정됐다. 흥미롭게도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3년 근로기준법은 ‘하루 8시간, 주 48시간’ 노동제를 규정했다. 1989년엔 ‘노동 민주화’ 투쟁의 여파로 ‘주 44시간제’가 시행됐다. 노무현 정부 땐 2004년 7월부터 공공부문, 금융보험업, 상시 1천 명 이상 대기업부터 ‘주 40시간제(주5일제)’가 실시됐다. 당시 개정법에 따르면 연차적으로 중소사업장으로 주5일제를 확대, 2011년부터는 대통령령으로 상시 20명 미만 영세사업장에도 ‘주 40시간제’를 실시키로 돼 있었다. 그리하여, ‘기업 경쟁력’은 물론, ‘노동자 삶의 질’도 향상하자는 게 기본 취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한 걸음씩 전진하던 것이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부와 함께 퇴행에 퇴행을 거듭 중이다. 아직도 30인 미만 사업장에 ‘주 40시간제’는 시행 유예(2022년까지의 ‘8시간 추가노동제’도 연장됨)가 반복된다. 심지어 2023년 12월을 마감한 최근 노동 판결은 ‘연장근로 산정방식을 하루 단위가 아닌 주 단위로 바꾸어’ 몰아치기 노동, 장시간 노동을 합법화했다. 일례로, 기업이 노동자에게 매일 17시간(기본 8시간 + 연장 9시간)씩 3일간 노동시키고 4일 쉬게 해도 합법이다! 이 경우, 하루 단위로 연장근로는 27시간으로 ‘1주 12시간’ 연장근로 한계를 벗어나나, ‘주 단위’로 보면 총 51시간이기에 ‘주 52시간’ 규정 이내라는 것! 그래서 자본과 그 언론은 늘 ‘주 52시간제’란 명칭에 집착했다! (나는 그에 반해,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이 기본이고, ‘예외로 연장근로 주 12시간 이내’임을 강조해 왔다.)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노동 상황이다.

시간이 ‘생명의 흐름’ 아니라 ‘돈’이라는 시간인식의 변화

어쩌면 자유시간을 비롯한 삶의 질을 향상하려는 노동자의 요구도, 가능한 한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노동강도를 강화해 잉여가치를 최대한 추출함으로써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려는 자본의 요구도 나름 일리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자의 입장이 ‘둘 다 말이 될 때’는 결국 ‘힘’이 최종 결정한다. 여기서는 노동의 힘과 자본의 힘이 대결 중인데, 자본주의에서는 대체로 자본의 힘이 노동의 힘을 압도한다.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여기서는 자본과 권력, 그리고 기득권층이 된 노동자들 역시 무언의 ‘이권 카르텔’에 소속되어, 소유와 분배, 생산과 소비의 양식을 바꾸는 덴 무관심하다. 변화로 잃을 게 많으면 두려움이 큰 법! H. 하이데 교수가 지적한 바, 이러한 행위 불능성(무감각, 무책임, 무관심)은 누적된 ‘집단 트라우마’의 결과로 해석된다(하이데 “재앙은 우리 곁에서 매일 일어난다” <녹색평론>182; 강수돌&하이데, <중독의 시대>). 그리하여 불행히도, 중하층의 노동자나 농민, 빈민들마저 (맑스의 ‘화끈한’ 예견과 달리 ‘혁명’은커녕) 대다수가 ‘강자 동일시’ 심리를 내면화한 채 상층 기득권층의 선전, 선동에 맹목적 박수를 치며 추종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촛불시민들’은 꾸준히 모이고 있고, 대안 언론이나 유튜브 방송 등이 건강한 여론 형성 중이라 아직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이것이 오늘의 또 다른 현실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 전망은 어떤가?

바로 여기서 나는 그 옛날, 아니, 불과 50~100년 전의 농어촌 사람들이 살아온 '생태적,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기억한다. 일례로,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전, 섬진강 하구 하동 금남면, 금성면, 그리고 광양 태인도 인근 바다는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다수가 가난하던 시절, 사람들은 물때가 되면 개펄로 가서 조개(백합, 재첩, 바지락, 우럭조개, 굴 등)를 잡고, 해초를 따거나 고기(숭어, 전어, 갯장어, 민물장어 등)를 잡아먹고 살았다. 누군가 제사를 지내면 별로 많지 않은 음식도 집집마다 나눠 먹고 살았다. 조선 인조 때인 1640년경 의병 출신의 김여익(1606~60)이 처음 시작했다는 김(해태) 양식도 처음엔 자급용 내지 진상용이었기에 (이후의 상업적, 산업적 생산방식에 비하면) ‘불규칙적’이고 ‘자연의 시간’을 따르며 ‘느린’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 모든 노동문화와 생활방식들이 산업화 내지 경제개발과 더불어 근본 변화를 겪는다. 마치 미햐엘 엔데의 <모모>에서처럼!

영국의 E. P. 탐슨이 1967년에 발표한 논문, “시간, 노동규율과 산업자본주의(Time, Work-discipline and Industrial capitalism)”는 이와 관련, 두 가지 시사를 한다. 하나는, 18~19세기 사람들 사이에 널리 관철된 ‘시간인식 변화’가 산업사회의 노동규율 강화 맥락이었단 점이다. 이제 사람들은 시간을 ‘생명의 흐름’으로 보지 않고 효과적으로 ‘소비할 자원’으로 인식한다. B. 프랭클린처럼, “시간은 돈”이 됐다! 다른 하나는, 노동규율의 내면화 이전에 사람들은 ‘노동 자체에 저항’했으나, 그 저항의 패배 및 노동규율의 내면화로 인해 19세기 이후로는 노동 자체에 대한 저항보다 단지 ‘노동시간 단축과 보상을 둘러싼 분배투쟁’에 전념하게 된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간이 곧 돈이라는 교훈”을 확고히 신념화한다. 마치 오늘의 우리들처럼!

 


대법원이 주 52시간 준수 여부 판단 기준에 대해 1일 8시간 초과분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주간 근무 시간을 모두 더해 초과분을 계산하는게 맞다고 판결한 가운데 26일 서울 마포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게시된 일자리 정보지에 근무시간이 표시돼 있다. 하루당 초과분을 기준으로 하면 일주일 중 3일 15시간씩 일한 경우 하루 8시간 근무에 7시간씩 초과해 근무한 것으로 연장근로시간의 합이 12시간을 초과하지만, 대법원 판결의 계산을 따르면 주간 근무 시간을 모두 더했을 때 45시간으로 52시간을 초과하지 않는다. 2023.12.26
일중독과 과로사라는 ‘노동 팬데믹’ 부를 장시간 노동체제

탐슨의 시각에 따르면 ‘노동시간 단축 투쟁’조차 ‘노동 거부 투쟁’에 비하면 이미 자본의 품 속에서 놀아나는 투쟁이다. 하물며, 노동자들조차 더 많은 수당과 고용안정(회사 성장)을 위해서라도 ‘장시간 노동’을 수용하는 분위기 속에서 과연 향후 노동(시간)의 전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기울어진 운동장’ 위의 ‘노사정 대화’에서 노동이 자본에 ‘협조’, 장시간 노동체제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면, 만성 과로는 물론 일중독과 과로사가 ‘노동 팬데믹’으로 될 것이다.

반대로 이런 전망은 어떤가? 과연 우리는 오늘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노동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모든 노동을 최대한 기술에 맡기고 대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마음껏 영위할 수 있을까? 동시에, 과거의 생태적,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더욱 고양,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런 가능성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이런 면에서 ‘자본주의’를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일단 삼삼오오 둘러앉아 개방적 분위기 속에서 이런 주제들을 두루 토론해 보자. (임금노예를 강화하는) ‘만성과로’의 길과 ‘자유시간’의 길, 이 갈림길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런 맥락에서 ‘시간 민주화’를 위해 당장 필요한 과제는 이렇다. a) 기상천외한 위 대법원 판결(12시간 연장근로 계산법 관련)을 바꾸기 위한 대안 마련, b) 현 한국의 연 1900시간 노동을 OECD 평균 수준(연 1752시간) 이하로 줄이기 위한 정치경제적 로드맵, c) 자본의 이윤을 위한 파괴적 생산방식을 인간적 필요 충족을 위한 생태적 생산방식으로의 문명 전환이다. 이런 과제가 시급하고 절실한 까닭은 더 이상 사람이 산재나 과로로 “귀가하지 못하는 현실”에 한탄만 하지 않고 보다 진취적으로 모두 “오후가 있는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과연 ‘가변자본’(잉여가치를 헌납하는 임금노예)인가, ‘삶의 주인’인가?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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