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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생활붓다 (Buddha) - '아는 자'
BY Ariya Kusala2022-05-20 09: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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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Buddha)- “아는 자”

붓다를 ‘붓다(Buddha, 깨달은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보리수 아래서 진리(담마)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붓다를 ‘깨달은 자’라고 부르면 일반인에게 깨달음이란 종교적으로 무언가 궁극적이고 심오한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위대한 성인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맞다. 사실 그렇다. 불교도이든 불교도가 아니든 간에 붓다가

가르친 내용(불교)을 보면 분명 붓다는 붓다 이전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불교를 모르는 일반인에게 거창하고 왠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멀게만 느껴지며, 어쩌면 편견이나

집착을 가져올 수도 있는 ‘깨달은 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뉘앙스를 가진 ‘아는 자’로 번역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물론 깨달은 자로 번역하든 아는 자로 번역하든 붓다가 깨달은, 혹은 알게 된 대상으로서의

진리는 전혀 다르지 않다.

붓다를 아는 자라고 하니, 그렇다면 “붓다는 무엇을 알게 된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붓다가 알게 된 내용,

즉 그 컨텐츠를 물어보는 것은 무엇(what)에 관한 질문이고, 어떤 과정이나 방법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어떻게(how)에 관한 질문이 된다. 필자는 붓다가 알게 된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

모두 온전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내용인 ‘무엇(what)’보다는 탐구방식인 ‘어떻게(how)’가 늘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를 알게 됨으로써 ‘무엇’에 대해 보다 올바르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How- 어떻게 알게 되었나?

그럼 먼저 붓다가 진리를 어떻게(how) 알게 되었는지 보자.

이미 블로그의 앞선 글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였으므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면, 붓다는 인과법칙, 즉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구조(인과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진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블로그의 「괴로움, 고(苦), Dukkha

(feat. 연기법, 사성제, sankhara)」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붓다의 깨달음을 얻게 된 과정은 연기와 사성제의 관계에서

사유구조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인과관계(인과율, 인과법칙)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연기도, 사성제도,

그리고 더 추가하자면 붓다의 가르침의 또 다른 바탕이 되는 업설[그야말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과율이라 할 수 있는]

역시 붓다가 인과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진리를 깨달은

자라고 불리는 붓다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인간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왜?’라고 묻는, 원인 또는 이유를 찾고자하는 보편적인 사유체계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순한 인과관계의 파악이라면 붓다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할 게 없지 않는가? 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인과관계의 파악이란 모든 사람이 각자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보편적 사유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질문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과관계의 파악이라는 논리적 추론의 틀이 아니라

그 논리적 추론의 틀에 들어갈 내용이다. 다음에 얘기할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 ‘내용(content)’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인과관계의 논리적 틀에 우리를 둘러싼 물질세계의 구조를 밝혀줄 만한 단서들을 넣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인과관계는 물질세계의 구조와 원리를 밝히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붓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실제로 경험하는 괴로움(苦), dukkha)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단서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자신의 인과적 논리의 틀에 적용해 나갔고[12연기의 사유구조], 따라서 붓다의 인과관계는 전반적으로

괴로움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 자신의 마음의 작동원리를 밝혀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이해를 위해

‘무엇’에 해당하는 내용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 다음에 오는 What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려 한다]

그리고 인과관계의 틀에 들어갈 내용과 함께 그 논리적 틀을 얼마나 철저하게 적용하는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인과적 사유는 ‘이것의 원인은 저것’과 같은 방식으로 단편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사유는 특히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관한 현실적인 대처법을 과거 자신의

경험에 비춰 도출해 내는데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일상의 순간적인 대처법을 찾기 위해 현재 상황을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깊이 있는 사유와 통찰을 동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붓다의 인과적 사유는 위에서 말한 인간 삶의 본질에 숨어있는 괴로움의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해 나가는

철학적 고찰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 외에는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길 단계까지 철저하게

사유 과정을 밀고 나아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장에 흔들릴만한 논리적 결함이 없는 완전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되고, 완벽하게 알게 되었다는 확신이 생기게 될 때까지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완전하게 깨달은 자’라는

의미의 붓다라고 불린 것이다.

덧붙여 붓다가 얻은 깨달음이 인과관계라는 순수한 논리적 추론만으로 획득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지나칠 수

있다. 깨달음 이후 붓다가 계율을 포함하는 실천 수행을 강조하였고 가르침의 교리적 측면에서 경험주의적 또는

실용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볼 때 붓다가 사용한 논리적 사유는 단순히 생각을 통한 추론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의 적용을 통한 검증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체험 속에서 인과관계를 파악

한다는 것 자체가 경험의 반영을 기본적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당시 인도에 널리 퍼져있던 진리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비량(比量)과 함께 현량(現量)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여기서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인과관계의 파악에 초점을 맞춘 논리적 사유(추론)만을 언급했지만,

사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게 된 방법(how)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이런 사유 방식만이 아닌 붓다가 어떤

환경에서 살았고, 누구에게 어떤 것을 배웠는지 등 모든 단서를 종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내용은 기존의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일대기를 말하는 자료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What- 무엇을 알게 되었나?

다음으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사유과정을 통해 무엇을(what) 알게 되었는지 보자.

이것도 핵심부터 말하자면, 붓다가 알 게 된 것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괴로움(苦, dukkha)을 겪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고,

이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제거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괴로움이란 게 무엇이고, 괴로움의 원인, 그 소멸, 소멸

방법까지 간략하게 설명한 사성제이다. 딱 잘라서 사성제라 말했지만, 사실 붓다는 사성제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연기를 알았거나 알게 되었고, 사성제에 포함되어 있는 갈애에 후에 무아를 설하게 되는 바탕이 되는 존재에 대한

갈애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특히 중요한 번뇌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 대한 갈애(혹은 그 소멸)를 알게 된 것은 이후 괴로움에 관한 진리(사성제)를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아론(오온설)을 추가해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 심화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한다[깨달음 이후 처음 다섯 비구들에게 설한 내용 [초전법륜경. SN56:11]

은 사성제와 팔정도만으로 이 설법으로는 다섯 비구들 중 꼰단냐 한사람만이 깨달음을 얻었지만, 뒤에 다시 붓다가

다섯 비구들에게 무아에 관한 내용[무아상경. SN22:59]을 설하자 다섯 비구 모두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였다].

불교를 마음을 탐구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붓다의 가르침이 사성제를 중심으로 한 괴로움(dukkha)에

대한 탐구를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가 말한 괴로움이란 병이나 죽음과 같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계발하느냐에 따라 없애거나 통제할 수 있는 정신적

고통에 중점을 두었다. 붓다가 탐구한 정신적 고통이란 우리의 뜻(의지)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찾아오는 정신적 불만족으로,

이는 갈애와 집착과 같은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바탕에는 우리가 뜻대로 할 수 없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근본적인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붓다가 초기경전에서 자주 언급하는 ‘조건 지어짐’으로, 우리는 조건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애초에 세상에서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란 한편으론 위에서 말한 갈애와 집착이며, 정신적 불만족을 일으키는 보다 근본적 원인으로 붓다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세상의 구조, 존재의 조건 지어짐 등과 같은 원리)을 알지 못하는 상태(무명)에 놓여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사성제든, 무아든, 연기든 붓다가 가르친 모든 내용은 기본적으로 갈애와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말하고 있고

이는 무명에 반대되는 지혜로서 이룰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정신적 괴로움이 발생하는 구조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정신적인 불만족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괴로움(dukkha)의 소멸이자 해탈, 열반이다.

붓다는 자신이 알게 된 것(진리)을 다른 사람들에게 언어를 통한 가르침(법)으로서 전달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의 진리,

붓다의 가르침(그리고 마음에 경험되는 현상; 법경에 해당하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dhamma(산스크리트어 dharma)’이다.

따라서 붓다가 알게 된 ‘무엇’은 ‘dhamma’라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 될 수 있다.

[출처] 붓다(Buddha), 아는 자|작성자 AriyaKus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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